작년의 가장 재밌게 본 영화 두 편을 고르라 한다면 나는 '조커'와 '포드 V 페라리'를 꼽을 것이다(두 영화는 조만간 리뷰 할 예정입니다). DC에서 '조커'를 너무 잘 만들어 버려서인지 할리퀸 주연의 '버즈 오브 프레이'를 내심 기대했었다. 예고편에선 할리퀸 특유의 정신없음을 다채롭고 화려한 색상의 영상미로 표현한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예고편의 모습도 내 기대를 높이기에 충분했다. 특히 마고 로비의 할리퀸이라면 뭔가 해낼 것 같았다. 감각적이고 유쾌한 코믹 액션 영화가 나올 줄 알았는데 이게 웬걸? '버즈 오브 프레이'를 보는 내내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 봤던 '키드 캅'이란 영화가 생각났다(키드 캅 : 한국 영화로 어린이들이 백화점에서 롤러 같은 걸 타면서 악당과 싸우는... 뭐 그런 내용이다. 어릴 때 아주 재밌게 봤던 기억이 있다).
내가 창작물을 볼 때 중요하게 보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창작물을 만든 의도이다. 두 번째, 그 의도가 잘 드러나는가 이다. 이 두 가지만 잘 지켜지더라도 꽤 괜찮은 창작물이 탄생한다. '버즈 오브 프레이'의 부제는 '할리퀸의 화려한 해방'이다. 내가 감독의 생각을 확실히 알 순 없지만 할리퀸 단독 주연 영화로써 할리퀸이 그만한 상업적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는 굉장히 할리퀸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처음 시작부터 끝까지 내용은 할리퀸의 입을 통해서 전달된다. 화려한 액션씬 또한 할리퀸에게만 집중되어 있다. 이는 곧 주인공 이외의 것은 힘을 많이 뺐단 얘기이다.
사실 '버즈 오브 프레이'는 첫 단추부터 잘못 꿰맸다. 이렇게 주인공을 두드러지게 만들려는 영화치고는 너무 많은 것을 담을 수밖에 없는 스토리이다. 원작의 스토리는 정확히 모르지만 내가 본 영화상의 스토리는 다양한 캐릭터들의 액션과 매력도 담아야 했고, 소녀, 여성들의 모험담도 담아야 했고, 고담시와 관련된 범죄와 블랙 마스크라는 악당에 대한 이야기도 담아야 했고, 색감을 이용한 영상미도 감독이 욕심을 냈고, 그 사이사이에 할리퀸이란 캐릭터 특유의 유머도 담아야 했다(이미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 많은 캐릭터를 한 번에 넣다 실패한 사례가 있는데도). 108분이라는 길지 않은 러닝타임에 이 모든 걸 주인공에 초점을 맞추면서 담기에는 역부족이지 않았나 생각된다. 결국 '버즈 오브 프레이'에선 이런저런 잡다한 것들이 한가득 '조잡하게' 담겨있다. 이렇게 되니 제작 의도는 불분명해지고 영화는 산으로 가게 된다. 결국 개봉 중에 영화 제목이 바뀌는 흔치 않은 사태까지 이어지게 된다(제목이 '할리퀸 : 버즈 오브 프레이'로 변경되었다). 자, 얘기하고 싶은 건 너무 많지만 적당히 몇 가지만 짚고 넘어가 보도록 하자.
먼저, 액션에 대해 얘기해보자. 사실 예전부터 DC 영화들의 액션씬이 그렇게 만족스럽진 않았다. 할리퀸보다 스케일이 큰 슈퍼맨, 저스티스 리그 등에서도 카메라나 속도의 문제 등으로 그렇게 깔끔하고 시원한 액션씬이 나오진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스케일이 작아졌다고, 남성 히어로에서 여성 히어로로 바뀌었다고 액션씬 자체의 매력이 반감되는 건 아니다. 마블의 '블랙 위도우'같은 경우도 큰 스케일은 아니지만 액션으로 충분히 만족감을 줄 수 있는 캐릭터였다. 같은 DC에서 나온 '원더 우먼' 또한 나쁘지 않았다. 허나 이번 '버즈 오브 프레이'에서 할리퀸의 액션은 크게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액션이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좋지 못하고 굉장히 정적이다. 중반부 들어서 액션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슬로우 모션이 너무 남발된다. 중요한 부분에서의 슬로우 모션은 분명 강조성과 감각성을 띄지만 '버즈 오브 프레이'에서는 슬로우 모션으로 쓸데없이 액션씬의 길이만 늘린 느낌이다. 그로 인해 액션씬이 시원하고 호쾌하기보다는 답답하고 지루하다. 이후에 할리퀸이 야구방망이를 들고 싸우는 부분만 유일하게 액션다운 액션을 보여준다. 후반부에 나오는 롤러를 탄 할리퀸의 엉성한 액션 장면은 다시는 상상도 하기 싫다. 아마 대부분의 관객들이 할리퀸이 폭탄을 던져대고, 펑펑 터지고, 시원하게 야구방망이로 스윙을 날리는 그런 액션을 기대했을 것이다.
액션 부분에서 더 크게 지적하고 싶은 점은 앞서 말한 '엉성함'이다. 사실 이 '엉성함'은 영화 전체적으로 배어있다. 다 말하고 싶지만 액션 부분에서만 얘기하겠다. '버즈 오브 프레이'에서 배우들의 액션은 하나같이 엉성하다. 격투를 한 번도 안 해본 사람들이 흉내 내는 느낌이랄까. 캐스팅의 문제? 아니면 트레이닝의 문제? 그것도 아니라면 의도된 것이었을까. 할리퀸이 롤러를 타고, 장난감 같은 무기들을 들고 싸우는 건 캐릭터상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이 엉성한 액션이 영화 전체를 유치하게 만들어 버린다. 내가 영화 '키드 캅'이 떠올랐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렇게 유치해져 버린 영화가 15세 등급 판정을 받았다. 유치한 액션씬 사이에 잔인한 장면들이 중간중간 나와서일 것이다. 여기서도 의도 자체가 불분명해진다. 이렇게 유치한 영화를 만들 거면 차라리 수위를 낮춰서 전체관람가 판정을 받든지, 아니면 아예 수위를 올려서 좀 더 범죄성을 짙게 띄든지 방향을 확실히 선택했어야 한다. 개인적으론 영화가 나오기 전부터 후자이기를 바랬다. 범죄자 집단인 '수어사이드 스쿼드'가 처음 나왔을 때도 '씬시티'와 같은 다크히어로물을 원했다. 차라리 이번 할리퀸 영화를 영화 '조커'에서처럼 할리퀸의 기원을 다루며 드라마+범죄/스릴러로 갔으면 어땠을까.
예고편에서 보여주었던 화려한 영상미나 색채도 그렇게 많이 활용하지 않았다. 화학 공장 폭파씬, 그리고 경찰서 전투씬에서만 눈에 띄는 연출 효과가 있었을 뿐 그 이외에 눈에 들어오는 색감은 없었다. 영화 '조커'에서 구도나 미장센 등은 영화 전체의 분위기에 큰 영향을 준다. '버즈 오브 프레이'에서는 그 역할을 '색감'이 할 것이라 생각했다. 예고편만 봤을 때는 '그랜드 부다페스트'가 생각났었다. 마고로비가 맡은 할리퀸은 그만큼 색감을 활용하기에 좋은 소재였다. 선택은 좋았으나 너무 소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든다.
중간중간에 끊임없이 나오는 전혀 유머러스하지 않은 유머도 이 영화의 재미를 반감시키는 요소이다. 이게 문화권의 차이 혹은 미국식 개그 코드의 문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지극히 한국인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유머가 재미가 없다. 영화를 보다가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었던 적은 몇 번 있는 것 같다. 결국 이 영화는 액션도 미적지근하고 영상미도 화려하지 않은 유치한 모험을 담은 범죄 코믹 영화가 되어버렸다. 욕심이 넘치면 화를 부르는 법이다. 한 영화에 너무 많은 걸 담으려다 보니 영화가 산으로 가버렸다.
DC의 영화들은 세계관 이용도 너무 못하는 것 같다. 마블 같은 경우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아주 탄탄하게 만들어져서 아무리 못 만든 영화라도 마블의 팬이라면 그 영화를 보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DC의 영화들은 그런 게 전혀 없다. 이렇게 좋은 소재들을 가지고 활용을 못하니 팬으로서 답답할 뿐이다. 앞선 마블의 성공을 보았더라면 뒤늦게라도 비슷한 시도는 해보는 게 어땠을까 싶다. 결국 '버즈 오브 프레이'는 국내 관객 40만 명에 그치고 말았다. 매력적이지 않은 캐릭터들, 액션과는 어울리지 않는 배우들, 개연성 없는 전개, 흥미롭지 않은 스토리 등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할많하않!).
그래도 단점만 있는 영화는 아니었다. 할리퀸의 머릿속처럼 정신없는 이야기 전개는 나름 매력적이었다. 할리퀸의 매력도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다만 배트맨을 좋아하는 팬으로서 DC의 이런 행보가 너무 아쉬울 뿐이다. 분명 흥행할 수 있는 소재인데 말이다. 나는 배트맨 다크나이트 시리즈나 이번에 나온 조커처럼 DC의 히어로물을 무게감 있게 만들었으면 좋겠다. '씬시티'나 '왓치맨' 등의 영화를 많이 참고했으면 좋겠다. 아쉬움이 많아서 오늘 말이 주저리주저리 많아져버렸다. 오는 6월에 나오는 '원더 우먼 1984'는 기대를 해도 될지 벌써부터 걱정된다. 포스터나 예고편에서도 '버즈 오브 프레이'와 같이 색감을 살린 연출을 보여줘서 더욱더 불길하다. 갤 가돗만은 기대를 저버리지 말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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